
< 정재만 교수>
며칠전에 "왕과 사는 남자" 영화를보고 단종의 아내 정순왕후와 나의 인연을 생각해본다. 나는 한동안 동대문, 청계천 근처에서 살았다. 그곳에 오래된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예전에 ‘영미다리’ 라고 불리던 자리가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나는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괜히 발걸음이 느려지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됐다. 그곳이 조선의 왕비였던 정순왕후가 남편 단종과 마지막으로 이별을 했다고 전해지는 자리라는 것을. 그 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 정업원' 이 있었다고 한다. 왕후가 궁을 떠난 뒤 머물렀던 곳이다.
나는 그 근처를 수도 없이 지나 다녔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평범한 동네라고 생각했지, 왕후가 살아냈던 자리라는 건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주동샘. 이름부터가 이상하게 끌린다. 자주색 샘이라니. 나는 천연염색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이 이름이 그냥 지나가질 않았다. 자초가 많아서 그 물로 자주빛을 물들였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장면이 바로 그려졌다.
“아, 여기서 물을 길었겠구나.” “여기서 천을 담갔겠구나.” 이건 염색하는 사람만 아는 감각이다. 왕후는 그곳에서
비단도 물들이고, 댕기도 만들고, 고름도 염색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나가 동묘 근처 '여인시장' 에 내놓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럼 지금은 어디지?” 내가 살던 그 동네에는 '평화시장' 이 있다. 늘 사람들이 붐비고, 물건이 오가고, 누군가는 만들고, 누군가는 팔고, 누군가는 사 간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달라진 게 뭐지?” 이름만 바뀌었지 하는 일은 똑같다. '여인시장'이 '평화시장'으로 이어진 것뿐이다.
나는 그 근처에서 염색을 했다. 그냥 내 일이라서 한 거였지,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연결이 됐다.
“아… 나도 지금 같은 일을 하고 있구나.” 정순왕후가 살던 자리에서, 같은 물이 흐르던 곳에서, 같은 ‘염색’이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까 동네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염색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천을 물에 넣고 꺼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다림이다. 한 번에 색이 나오지 않는다.
여러 번 반복해야 하고,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아마 왕후도 그랬을 것이다. 나도 그걸 안다. 같은 일을 해왔으니까.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우연히 그 동네에 살았던 걸까?” 아니면 물 따라, 색 따라 그 자리에 가 있었던 걸까.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차로 조금만 가면 '사릉' 이 나온다.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불과 20분 거리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동대문에서 살고, 청계천 물을 보고, 그 근처에서 염색을 하고, 이제는 왕후의 마지막 자리까지 가까이 두고 살고 있다. 이쯤 되면 그냥 우연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참 깊은 인연이로다.”
정재만 한국뉴욕주립대학교 패선 디자이학과 교수/ 약초보감 대표
(농업환경뉴스)


















